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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카와 긴긴잔

Aikawa Gold and Silver Mine

에도시대

아이카와 금은산의 본격적인 개발은 1601년에 시작되었고 사도는 에도 막부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놓였습니다. 이와미, 이쿠노, 가이 등지에서 산사(山師)라 불리는 광산 경영자가 모여 최첨단 측량, 채굴(갱도 채굴), 금은 제련 기술(회취법, 유황분은법, 소금법)이 도입되었습니다. 이 기술들로 인해 아이카와 금은산은 금 생산량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고 이후 사도의 기술은 전국 각지의 광산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채굴부터 금화 제조까지 시행한 광산은 일본 국내에서도 사도가 유일하며 그 공정을 뚜렷이 그린 광산 두루마리가 100점 이상 남아 있습니다. 두루마리에는 광산 기술이나 광산 경영 변천 등을 상세히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도유의 골짜기(촬영:니시야마 호이치)

도유의 골짜기

16세기말부터 400년 이상에 걸쳐 채굴된 일본 최대의 금은광산. 각 시대 의 유적과 광산마을 등이 오롯이 남아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일. 도유의 골짜기는 사도 긴긴잔의 상징으로서 에도시대에 부를 가져다 준 도 유광맥의 노두채굴유적이다.

사적 사도 금산

에도 시대의 갱도 ‘소다유코’ 등을 공개하고 있다. 금산에 관한 박물관도 있으므로 당시의 모습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사도 봉행소 터

1603년에 오쿠보 나가야스가 설치한 것으로, 에도 시대 사도의 광산 경영과 행정의 중심. 2000년에 복원.

▲ ’사도 금 채굴’ 두루마리(아이카와 향토박물관 소장)

촬영:니시야마 호이치

가타베・가노우라 해안 채석장

유적 에도시대 광산용 맷돌의 아랫돌을 채석 하던 곳으로, 채석장 14군데서 105곳의 발파흔이 확인되었다.

촬영:니시야마 호이치

후키아게 해안 채석장 유적

광산용 맷돌 중 윗돌 석재 채석장으로, 근세~근대에 이르기까지 장기적으로 채굴이 이루어졌다. 해안선 암반에는 발파흔과 끌 흔적 등이 다수 남아 있다.

메이지시대 이후

메이지시대 아이카와 금은산과 쓰루시 은산은 ‘사도 광산’이라는 명칭으로 1869년에 관영화된 후, 1896년에 미쓰비시 그룹에 매각됩니다. 이 기간 외국인과 해외로 유학한 일본인 기술자 등이 부임하여 수갱을 축으로 일정 간격으로 수평 갱도를 파는 방법과 광석 운반 기계화 등이 달성되었습니다. 이러한 구미에서 도래된 선진적 광업기술로 인해 금은 생산량은 대폭 증가하여 사도 광산은 일본을 대표하는 근대적인 광산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촬영:니시야마 호이치

수직갱도

1877년에 완성된 귀금속 광산으로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수직갱도. 광석, 사람, 물자 운반에 사용되었으며 가장 깊 은 곳은 352m에 달한다. 일본 광업 근 대화를 상징하는 건조물 중 하나이다.

촬영:니시야마 호이치

기타자와 부유선광장

1938년에 완성된, 채취한 광석을 분류 하고 제련하는 설비. 그 후의 확장으로 연간 5만 톤의 광석 처리능력을 갖추는 등, 동양 최대규모를 자랑하게 되었다.

촬영:니시야마 호이치

오마항

1892년에 완성된 항구로, 광석 수송 및 석탄 등의 생산자재 반입에 사용되 었다. 현재도 석재호안, 트러스교, 로더 교각, 크레인 스탠드가 남아있다.

촬영:니시야마 호이치

도지가와 제2발전소

메이지시대 이후 광산에 전력을 공급하 기위해 화력발전소가 건설되었다. 화력 외의 예비전력을 얻기 위해 수량이 풍부 한 도지가와 강에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었다. 도지가와 제2발전소는 1919년에 완 성되어 1977년까지 가동되었다.

광산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교마치길

佐渡金銀山のユネスコへの推薦を求める署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