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미카와 사금산

Nishimikawa Placer Gold Mine

헤이안시대의 ‘곤자쿠모노가타리슈 설화집’에도 등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도에서 가장 오래된 사금산

사도의 남서부에 위치한 마노 지구의 니시미카와 사금산은 12세기 말에 편찬된 것으로 여겨지는 ‘곤자쿠모노가타리슈 설화집’에 사금 채취가 행해지고 있었다는 설화가 남아 있는, 사도에서 가장 오래된 사금산입니다. 1589년에 사도를 지배한 에치고 지방의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니시미카와 사금산을 재개발하였습니다. 산출된 사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헌상되었고, 1593년 무렵에는 광산의 안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오야마즈미 신사도 세워졌습니다.

16세기 후반, 현재의 사사가와 촌락은 한 달에 사금 18닢(약 2.9kg)을 세금으로 납부했기 때문에 ‘사사가와 주하치마이무라(18닢촌)’라고 불렸으며,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고 전해집니다. 니시미카와에서는 사금을 채취하기 위해 사금이 섞여 있는 산을 굴착하고, 필요 없는 돌과 흙을 대량의 물로 씻어낸 다음 남아 있는 사금을 거름판에 올려 흔들어 선별하는 ‘오나가시’라 불리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오나가시 선별에 필요한 물을 공급받기 위하여 주변에는 여러 개의 수로가 만들어졌는데, 가장 긴 것은 9km 이상이나 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에도시대에 들어서며 아이카와에 사도 봉행소가 설치되자, 니시미카와도 중요한 광산으로 규정되어 사도 봉행소로부터 ‘니시미카와킨잔야쿠’라는 관리가 파견되어 사금 채취가 계속되었지만, 점차 산출량이 감소하여 1872년에는 폐광되었습니다.

그리고 사금 채취를 했던 사람들은 생계 수단을 농업으로 전환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지금도 이 지역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습니다. 촌락 주변에는 사금을 채취한 산과 수로 등의 흔적도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에도시대의 지도와 비교해 거의 변함이 없는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도라마루야마산(촬영: 니시야마 호이치)

도라마루야마산

니시미카와 사금산 최대의 채굴지입니다. 사금을 채취하기 위하여 굴착한 산의 경사면에는 지금도 식물이 자라지 않으며, 붉은 산 표면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국가사적·국가중요문화적경관)

고샤야야마산의 돌쌓기 작업 오두막 터
(촬영: 니시야마 호이치)

고샤야야마산의 돌쌓기 작업 오두막 터

고샤야야마산은 에도시대에 사금이 함유된 산의 지층을 굴착하고, 수로를 정비한 후, 둑의 물을 단숨에 흘려보내 불필요한 토석을 씻어내는 ‘오나가시’방식으로 사금이 채굴되었던 장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곳에서는 조업이 중지된 1872년경부터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금 채굴지와 둑, 수로는 물론, 돌쌓기 작업 오두막 터 등도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당시의 사금 채취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국가사적·국가중요문화적경관)

사사가와 촌락

사사가와 촌락

사금을 채취하던 사람들의 마을입니다. 전통적인 목조가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마을로, 당시 광산 촌락의 모습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오나가시 선별법’을 통해 배출된 많은 폐석들이 가옥의 기초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국가중요문화적경관)

가네코 간자부로 주택(촬영: 모노크롬 니가타)

가네코 간자부로 주택

에도시대부터 1872년에 폐광될 때까지 사금산의 관리직을 대대로 역임한 가네코 가문의 주택입니다. 19세기에 세워진 이엉을 엮어 만든 지붕을 얹은 본채를 비롯해 토광, 헛간, 외양간 등이 남아 있습니다. (국가사적·국가중요문화적경관)

오야마즈미 신사(촬영: 니시야마 호이치)

오야마즈미 신사

1593년에 사금산의 번영과 안전을 기원하여 세워진 신사입니다. 경내에 있는 노 무대는 19세기 후반경의 건물로, 1950년 무렵까지 노 전통극이 행해졌습니다. 니시미카와 사금산 주변은 섬 내에서도 노 전통극이 대단히 활발히 행해진 지역으로, 노는 신에게 공납하는 제사의 성격을 띤 전통극이었지만, 촌락 주민들에게는 오락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국가사적·국가중요문화적경관)